행사 장소 — 사후 용도를 먼저 정하고 지었다
행사 장소(그린박스 01)에서 대형 대회가 반복하는 실패의 구조는 늘 같다. 대회 요구사항이 먼저 있고, 시설은 그 요구사항을 충족하도록 지어지며, 사후 활용은 대회가 끝난 뒤에 찾는다. 순서가 이렇게 놓이면 사후 활용은 언제나 사후에 붙이는 변명이 된다. 관중석 수만 석짜리 시설을 지어 놓고 대회가 끝난 다음에 이 시설을 무엇에 쓸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답이 나올 리 없다. 애초에 그 규모를 필요로 하는 일상 수요가 그 도시에 없기 때문에 대회용으로 지은 것이다.
산티아고 2023은 이 순서를 뒤집었다. 대회는 4개 주 19개 코무나에 흩어진 경기장 41곳을 썼는데, 신설 비중이 큰 국립경기장 일대에 대해 조직위와 칠레 정부가 먼저 합의한 것은 대회 요구사항이 아니라 대회 이후의 용도였다. 국립경기장 주변 64헥타르를 스포츠파크로 정비하되, 그 안에 들어갈 시설은 대회가 끝난 뒤 생활체육 시설로 그대로 쓰일 수 있는 규격과 배치로 짓는다는 것이다. 총 투자액은 약 1억 4,700만 달러로, 이 가운데 1억 2,200만 달러가 9개 경기 시설에, 2,500만 달러가 공원 자체에 들어갔다.
공원에 들어간 2,500만 달러가 이 사례의 핵심이다. 경기 시설 예산이 아니라 공원 예산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녹지 10헥타르, 자전거와 조깅을 위한 5.3킬로미터 순환 코스, 하키·격투기·패럴림픽 종목·구기·수상·육상·테니스·라켓 종목·스케이팅 훈련센터와 도시형 스포츠 광장이 배치됐다. 이것들은 대회 기간에 훈련장으로 쓰이지만 설계 기준은 대회가 아니라 평상시 시민 이용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 칠레 국립체육원은 대회에 쓰인 16개 시설에서 150개 생활체육 강좌를 열었다.
규모를 비교해 보면 이 결정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올림픽파크가 35헥타르, 리마의 국립스포츠빌리지가 20헥타르인 데 비해 산티아고는 64헥타르다. 남미에서 가장 큰 도시형 스포츠파크가 됐다. 다만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면적의 크기가 아니다. 같은 돈으로 경기장 한 동을 더 크게 지을 수도 있었는데 그 돈의 상당 부분을 대회 기간에는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 녹지와 산책로에 썼다는 배분의 방향이다. 대회 기간의 성능이 아니라 대회 이후 20년의 이용률을 기준으로 예산을 나눈 결과다.
한국의 행사 실무로 옮기면 이 순서는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새 시설이 필요한 행사를 기획할 때 사업계획서에 사후 활용 계획을 한 장 붙이는 것과, 사후 활용 주체가 설계 단계부터 발주처와 함께 앉아 규격을 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문서고 뒤의 것은 설계 조건이다. 사후 활용 계획이 설계 조건으로 바뀌지 않으면 그 문서는 준공과 동시에 효력을 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