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 의전이 지배하는 행사에서 지속가능성이 설 자리
지속가능성 전략(그린박스 00)의 관점에서 국제 정상회의는 가장 까다로운 종목이다. 관중 동원형 축제와 달리 참가자는 수천 명 규모로 적지만, 의사결정의 우선순위가 압도적으로 보안·의전·외교 일정에 쏠린다. "일회용을 줄이자"는 제안이 경호 동선이나 국가 의전과 충돌하는 순간, 대개 지속가능성이 먼저 접힌다. 게다가 회의는 이틀이면 끝나고 조직은 해산한다 — 장기 목표를 세울 주체 자체가 사라지는 구조다.
2025년 10월 31일~11월 1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이 제약을 정면으로 인정한 채, 건드릴 수 있는 영역부터 골라 손을 댔다. 회의 주제 자체가 '지속가능한 내일의 구축: 연결·혁신·번영(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 Connect, Innovate, Prosper)'이었고, 정상들이 채택한 경주 선언은 식량 손실·폐기 저감과 농식품 체계의 회복력 같은 의제를 담았다. 그러나 회의의 '내용'이 지속가능성을 말하는 것과, 회의의 '운영'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두 번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의전 절차를 바꾸는 대신, 의전에 쓰이는 **물건의 출처**를 바꿨다. 국내 행사 기획자가 배울 만한 전략적 판단이 여기에 있다 — 운영 절차를 흔들 권한이 없을 때는, 조달 목록을 지렛대로 삼는 것이 가장 저항이 적으면서 눈에 보이는 경로다.
